강익중 1960~

한국의 설치미술작가. 다인종·다문화를 바탕으로 지구촌 시대의 조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청사 메인홀의 벽화와 뉴욕 지하철역의 환경조형물 등을 제작하였다.

강희안 (인제) - 1417 ~ 1464

15세기 대표적인 선비화가. 자는 경우(景愚), 호는인제, 본관은 진주(晋州),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 觀水圖)]는 명대의 원체화풍과 절파화풍을 수용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턱을 팔로 괴고 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고사(덕이높고 나이많은 선사)를 주제로, 주변의 산수는 그를 위한 무대장치처럼 그렸다. 이러한 인물중심의 그림은 자연을 위주로 표현하던 안견파의 산수화와는 큰 대조를 보여주는 새로운 양상이다. 즉 강희안이 활동하던 15세기 중엽의 조선초기의 화단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매우 새롭고 첨단적인 것이다. 이 시기에는 북송대 회화의 영향을 받아 안견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웅장한 모습의 산수를 주로 묘사하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인물은 미세하게 상징적으로만 나타내는 것이 압도적인 추세였다. 따라서 고사관수도(高士 觀水圖)의 화풍은 그 당시로서는 최신의 화풍으로 전통주의적이었던 화원들에게는 생소한 느낌의 양식이었으리라고 믿어진다. 어쨋든 당시로서는 가장 새로왔을 이러한 화풍이 강희안과 같은 선비화가에 의해 전래되고 수용되었음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며, 당시의 한.중간 문화나 회화의 교섭이 활발하였음도 짐작케 한다.

김명국 (연담) - 1600 ~ ?

김명국(1600-?)은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본관은 안산(安山)이며,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밤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했으며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대부분의 그림들은 취중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기질은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즉 굳세면서도 매우 호방하고 거친 필법을 보인다. 그의 작품은 조선 전기의 안견파 화풍을 보이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사학파적인 산수인물화이다. 화제는 산수화나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가 주류를 이루는데, 대담한 붓질로 간략하게 표현하면서도 대상의 내면적 세계를 잘 표출하였다. 작품은 설중귀려도, 달마도 등이 있다.

김수자 1957~

한국의 설치미술가·판화가·서양화가. 천을 이용한 작업을 주로 하며 '보따리 작업'으로 유명하다. 평면 작업에서 오브제와 설치미술, 퍼포먼스와 비디오 작품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평면과 입체, 공간과 시간, 삶과 예술을 아우르는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식 (퇴촌) - 1579 ~ 1662

퇴촌(退村)김식은 김기(金祺)의 손자이며 양송당(養松堂 ) 김제의 종손(從孫)으로 가법(家法)이은 화가로 특히 물소그림을 잘 그렸다. 조선 초기와 중기가 교차한 16세기 중엽부터 동물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암을 이어 중기(17세기 전반)에 김식이 산수와 소(牛) 그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후기의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등에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 작품으로는 [수하모우도] 등이 있다.

김응환 (복헌) - 1742 ~ 1789

진경산수의전통을 이은 김응환은 화원 출신으로 상의원(尙衣院) 별제(別提)를 지냈으며, 정조(正祖)의 명령을 받고 금강산을 사생한 기록으로 보아 [헐성루도]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742(영조 18)-1789(정조 13) 조선 화가. 자는 영수(永受), 호는 복헌(復軒), 본관은 개성(開城).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으로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에 이르렀다.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내외금강산(金剛山)을 유력(遊歷)하면서 그림을 그려가지고 돌아왔고, 1789년 왕명으로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목적으로 일본을 향해 출발, 부산까지 가서 병사했다. 이때 어린 나이로 수행한 김홍도(金弘道)는 그의 장례를 치른 뒤 혼자 쓰시마도(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왕에게 바쳤다.

김 제 (김시) - 1524 ~ 1593

명종과 선조 때에 활약한 선비화가로 최립의 문장, 한석봉의 글씨와 더불어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김안로(金安老)의 아들로 형인 김기(金祺), 종손인 김식(金埴)과 김집 등과 함께 화가가문을 이루었다. 산수, 인물, 우마(牛馬)등 다방면의 주제를 그렸고 화풍도 다양하였으나 특히 안견파화풍과 절파계(浙 派系)화풍을 즐겨 구사하였다. 절파계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는 호암 미술관 소장의 [동자견려도 童子牽驢圖]를 들수 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주산의 형태나, 강한 필묵법이나 부벽준으로 대충 처리된 대담한 산의 묘사로 보아 절파, 특히 그 후기 양식과 유관함을 보여준다.

김환기 (수화) 1913 ~ 1974

전남 신안 출생. 1936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194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二科會)와 자유전(自由展) 등에 출품, 신미술(新美術:아르누보) 운동에 참여하였고, 8 ·15광복 후에는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연속적인 사각 공간 속에 점묘(點描)를 배열하였으며,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초기 수업시대는 미술학교 재학시와 연구과 시절, 귀국하기까지의 몇 년 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과회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여 당시 일본 신감각파 대열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의 청년시절은 한국적 모티프 발견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운학(雲鶴) ·달 ·산 ·나목(裸木) ·꽃 ·여인을 통해 한국적 풍류의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지배적 경향이다.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 귀국하기까지의 파리시절에서도 농도를 더하였다. 약 10년간 미국에 있을 때에는 외견상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해 많이 변모하였는데, 우선 모티프 해소, 순화된 색감, 공간의 심화와 확대라는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실지로 작품상에는 어떠한 변모도 초래하지 않았으며, 작가 내면의 발전으로 여과시킨 심화현상일 뿐이다. 대표작으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론도》《해와 달》 등이 있다. 한편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세워져 1992년 개관되었다. 안좌면(安佐面) 읍동리(邑洞里)의 그의 생가는 지방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나혜석 1896~1948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박수근 1914 ~ 1965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화단에 등장하였다. 8·15광복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하우스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1959년 제8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을 지냈다. 작품경향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나 한국적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다. 대표작에 《빨래터》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이 있다.

백남준 1932 ~ 2006

한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이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신사임당 - 1504 ~ 1551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 여류 문인, 서화가. 잘 알려져 있는 바대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여류화가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그림에 있어서는 산수, 포도, 대나무, 매화꽃, 그리고 초충(草蟲-나비, 벌, 메뚜기 등 풀벌레)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다루고, 산수에 있어서는 안견을 따랐다고 전해진다. 「초충도」들은 한결같이 단순한 주제, 간결한 구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표현, 산뜻하면서도 한국적 품위를 지닌 색채감각 등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사실상 조선시대의 모든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분야의 절대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작(眞作)보다는,그의 작품이라 추축되는 작품들이 많이 전해진다.

안 견 (현동자)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안견은 조선시대 최고의 산수화가로 곽희파화풍을 토대로 마하파 화풍 등 다양한 화풍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안견파화풍]을 이루었다. 이 화풍(양팽손, 정세광, 신사임당, 이정근, 이징 등)은 조선초기는 물론 조선 중기에까지 이어졌고 일본에 건너가 주문파(周文派)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안견은 산수화만이 아니라 초상화, 화훼, 매죽, 누각, 준마, 의장도 등 다양한 화제를 그렸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현재는 오직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만이 진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양평대군이 1447년 4월 20일(음력)에 꿈 속에서 도원을 여행하고 그 내용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고 당시의 명사들을 시켜 찬시를 짓게 한 것이다. 안평대군의 발문과 그가 1450년 정월 초하룻날 지은 시, 신숙주, 이개, 정인지, 박팽년, 서거정, 성삼문 등 모두 23편의 찬문이 곁들여져 있어 이 그림의 미술사적 가치를 한층 다져 주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도연명의[도화원기(桃花源記)]와 깊은 연관이 있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이 강하게 반영되 있어 엄격한 전체적 유교사상과 대조를 이루는 개인적 자유를 희구하는 노장사상(老 莊 思想)의 일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외쪽 하단부를 현실세계로, 오른편 상단부를 이상세계로 전개하는 것이 이색적이다. 구도에 있어서는 좌반부는 정면에서 본 것으로 그려지고 우반부는 도원의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 본 듯 한 시각으로 그려졌다. 이런 조감도법을 활용함으로써 안견은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넓은 면적의 도원을 성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중앙부의 산 하나의 높이를 현저히 낮춤으로써 도원의 면적을 더욱 넓게 보이도록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몽유도원도]의 전체적인 구도, 공간의 기술적인 처리, 평원과 고원의 대조에 의한 산수의 웅대성, 그리고 환상계의 성공적 구현 등에는 중국화에서 볼 수 없는 안견 특유의 뛰어난 재능이 잘 발휘되었다고 하겠다.

양팽손 (학포) - 1480 ~ 1545

조선 학자.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본관은 제주(濟州), 이하(以何)의 아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여 13세 때 송흠(宋欽)의 문하에 들어갔고,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조광조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519년(중종 14)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削職)당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후 복관(復官)되어 1544년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내다 사직했다. 글씨를 잘 썼고, 산수도가 전해지고 있다.

어몽룡 (설곡) - 1566 ~ ?

조선 중기의 선비 화가로서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견보(見甫), 호는 설곡(雪谷) 또는 설천(雪川)이다. 1604년(선조 37)에 충청북도 진천 현감을 지냈다. 오로지 매화 그림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어 이정(李霆)의 대나무, 황집중(黃執中)의 포도와 함께 삼절로 일컬어졌다. 그의 묵매화는 굵은 줄기가 곧게 솟아나는 간소한 구도와 단출한 형태, 그리고 격이 높은 담백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특유의 직립식 구도 등으로 조선 중기 묵매화의 새로운 전통을 이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월매도(月梅圖)〉가 있다.

윤두서 (공재) - 1668 ~ 1715

윤두서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증손으로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과 함께 화가집안을 이루었으며,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화풍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화가로 산수화에서는 절파화풍을 계숭하면서 소극적으로나마 남종화를 수용하여 그렸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던 선비화가로 산수화는 물론 말과 인물, 초상 등 다양한 주제를 그렸는데, 이러한 소재들을 다룬 그림들은 특히 18세기 화단과 연관지어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사대부 출신으로서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윤두서의 그림 실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물화라 하겠다. 당시 초상화로 명성이 나있던 윤두서는 숙종의 어진(御 眞)제작에 추천되기까지 하였으나 남구만 (南九萬)의 반대로 좌절된 일화도 있다.

윤 용 (청고) - 1708 ~ ?

조선 화가. 자는 군열(君悅), 호는 청고(靑皐), 본관은 해남(海南), 두서(斗緖)의 손자, 덕희(德熙)의 아들. 1735년(영조 11) 진사시 합격, 조부와 부친에 이어 그림을 잘 그렸다. [작품] 연강우색도(烟江雨色圖) [문헌]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윤의립 (월담) - 1568 ~ 1643

윤의립(1568-1643)은 조선 중기의 선비 화가로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지중(止中), 호는 월담(月潭)이다. 공조판서를 지낸 윤국형(尹國馨)의 아들이며 선비 화가 윤정립(尹貞立)의 형이기도 하다. 1594년 과거에 급제하여 의정부의 좌참찬을 지냈다. 《동국문헌》 화가편(畵家篇)에 의하면 그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나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문 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화첩(山水畵帖)》 정도가 알려져 있다. 윤의립은 안견파화풍 과 남송의 하규 화풍을 수용하여 그렸는데《산수화첩 山水畵帖》 중에서 [추경산수도]는 산이나 바위의 묘사는 물론 수지법에서도 남송 하규화풍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나, [하경산수도][동경산수도]는 모든 면에서 안견파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윤정립 (학산) - 1571 ~ 1627

윤정립은 조선시대의 선비 화가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강중(剛中), 호는 학산(鶴山) 또는 매헌(梅軒)이며 윤의립(尹毅立)의 동생이다. 1605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냈다. 중년 이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음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아울러 시문(詩文)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적은 편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관폭도 (觀瀑圖)와〈행선도(行船圖)〉등이 알려져 있다. 그는 주로 산수를 배경으로 한 인물 중심의 산수인물화를 그렸는데,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 화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경운 (낙파) - 1545 ~ ?

조선 화가. 자는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坡), 낙촌(駱村), 학록(鶴麓), 본관은 전주(全州), 서화에 능했던 그는 성종의 열한 번째 아들인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증손이다. 처음 학림수(鶴林守)에 봉해졌다가 후에 학림정(鶴林正)에 진봉되었다. 그의 동생인 이영윤과 아들 이징도 모두 그림과 글씨를 잘하였다.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인물과 한국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영모(翎毛), 우마(牛馬)를 잘 그렸으며 모두 색감과 정취가 뚜렷했다. 작은 폭의 산수인물화는 인물들의 고결한 품격이 돋보이고, 배경의 산수에서 당시에 많이 그려지던 절파 화풍을 보여준다. 많은 작품이 그의 작품이라 전해오는데 모두가 진품인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불해 - 1529 ~ ?

조선 서화가. 자는 태수(太綏).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지식이 해박하고 필치가 정교하여 당시 안견(安堅)에 다음가는 거장(巨匠)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가계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고 윤두서의 《화단(畵斷)》과 남태응의《청죽화사 (靑竹畵史)》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 작묘도(鵲猫圖) 등 몇점 뿐이다.

이상좌 - 15세기말 ~ 16세기초

안견과 강희안의 화풍에 이어 조선초기의 산수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인물이 이상좌의 화풍이다 이상좌는 본래 어느 선비의 노비였으나 타고난 그림재주 덕분에 면천되고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좌는 산수화만이 아니라 인물화도 뛰어났는데 산수화는 남송의 마하파화풍을 따른 것들이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왼편으로 치우친 일각구도와 직각을 이루며 구부러진 소나무,생략된 원경, 오른편 하단의 인물 표현 등으로 보아 이 작품이 마원화풍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하여 조선 초기에 남송대의 마하파화풍이 우리 나라에 수용되는 과정을 볼수 있다.

이숭효

이숭효는 화원으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백달(伯達)이다. 화가인 이상좌(李上佐)의 아들이며 나옹 이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고 작품도 드물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 아들인 이정은 작은아버지인 이흥효의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작품이 드물어 화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어부도〉를 통해 보면,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절파 화풍을 구사했으며 그림에 상당한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암

왕실 출신후손으로 임영대군 이구의 증손인 이암은 특히 영모(翎毛-개, 고양이 등 털이 난 동물)를 잘 그렸다. 송나라의 모익(毛益)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나 이암의 동물화풍은 모익의 것과 현저하게 다르다. 이암은 조선 초기와 중기가 엇갈리는 16세기 중엽에 활동하며 독특한 동물화의 세계를 펼친 중요한 인물이다. 작품으로는 모견도와 화조구자도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그의 자(字)인 정중(靜仲)으로 보다 잘 알려져 있고, 한때는 일본에서 자기네 나라의 화가로 잘못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영윤 - 1561 ~ 1611

조선 화가. 자는 가길(嘉吉), 본관은 전주(全州), 청성군(靑城君) 걸(傑)의 아들. 종친(宗親)으로 죽림수(竹林守)에 봉해졌다. 이경윤의 동생으로 형과는 다르게 산수, 우마(牛馬),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그의 작품으로는〈화조도(花鳥圖)〉와 〈산수도〉가 전해지는데, 산수도에는 중국 원나라 말기의 유명한 화가 황공망을 따라 그렸다고 적혀 있고, 작품에서도 남종화풍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남종화풍의 이 작품은 절파 화풍이 유행하던 당시로서는 특이한 것으로, 일찍이 남종화풍을 수용하였던 진취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회화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정 (나옹) - 1578 ~ 1607

이상좌의 손자이며 이숭효의 아들로 이흥효를 숙부로 대대로 화원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나 30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전통주의적인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진보적 경향을 보여준 화가이다. 이정의 산수도는 안견파의 전통적 양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절파양식이 가미된 새로운 요소들을 보여준다. 주산과 중간의 풍경에 비스듬한 언덕을 주위를 둘러싼 어두운 면으로 구획하여 처리한 점등은 완전히 절파적인 양식인 것이다. 이런 공통점은 이흥효의 산수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이정과 이흥효등 17세기 조선 중기의 화가들이 새로운 화풍에 대해 전통주의적인 수용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엿보게된다. 작품은 「한강조주도」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정 (탄은) - 1541 ~ 1622

고려시대의 선비와 승려들 사이에서 널리 그려지던 묵죽(대나무를 먹으로만 그림)은 조선 초기에 화원의 중요 과목으로 채택될만큼 중요한 분야로 여겼다. 조선 중기에도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대나무화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이정이다.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왕실출신인 이정은 임진왜란때에 왜병의 칼에 오른 팔을 상하여 그 후로는 왼팔로 그렸으나 그림의 격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전해진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이정은 명나라의 묵죽화풍을 소화해내 조선적 묵죽화의 전통을 만들어 나갔고 그의 영향은 매우 커서 후대의 묵죽화는 거의가 그의 양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임에 반하여, 그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즉, 통죽의 마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弧形線)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두르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떼고 아랫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 묵죽화 또는 묵란화에서 토파(土坡)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산수화의 주류인 절파화풍(浙波畵風)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宋代)의 것보다 명대(明代)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따라서, 그는 소동파나 문동의 묵죽양식도 하창(夏昶)이나 또는 그 뒤를 따른 주단(朱端) 등의 명대 화가들에 의해서 변형된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강한 필력과 잘 잡힌 구도를 보이며, 조선 묵죽화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기년작(記年作)으로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죽도(竹圖)>가 만력갑?萬曆甲午), 즉 1594년에 해당하여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그의 만년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죽도(雨竹圖)>가 있으며, 여기에 천계임술(天啓任戌), 즉 1622년의 연대가 적혀 있다. 이밖에도 낙관이 있는 묵죽화는 많이 전한다. 그가 인물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문월도(問月圖)> 두 폭이 개인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그림은 모두 절파양식을 강하게 보이는 인물화이다.

이중섭 (대향) 1916~1956

평남 평원(平原)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이 징 (허주) - 1581 ~ 1674

조선 중기의 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함(子涵), 호는 허주(虛舟)로서, 16세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庶子)이다.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수행 화원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궁중의 행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645년에 중국인 화가 맹영광이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간 머무르고 돌아간 적이 있는데, 머무르는 동안 그와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산수와 인물, 영모(翎毛), 초충(草蟲) 등을 모두 잘 그려 당시에 가장 기량이 뛰어난 화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능숙하게 잘 그리기는 하되 독창적이지 못하고 옛사람들의 법을 흉내내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보수성은 그가 화원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흥효 - 1537 ~ 1593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중순(仲順), 본관은 전주(全州), 화원이었던 이상좌의 아들이고 이숭효의 동생으로 조선 중기 유명한 화가집안을 이루었다. 형 이숭효가 죽자 조카인 이정(李楨)을 맡아 훌륭한 화가로 대성시켰다고 한다. 명종의 어용(御容)까지 그린 탁월한 재능의 화원으로 김제의 필법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팔경도(八景圖)>와 1539년에 그린〈산수도〉(개인소장) 한 폭이 전하고 있는데,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波) 화풍과 절파(浙派) 화풍이 간취되는데 이러한 절충적 경향은 조카인 이정(李楨)에게 계승되어 17세기 화단으로 이어졌다

장승업 (오원) 1843~1897

본관은 대원(大元)이고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暝居士) ·문수산인(文峀山人)이다. 조선 말기의 화가로서 근대 회화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산수와 인물 등을 잘 그렸고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겨 안견(安堅)·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정 선 (겸재) - 1676 ~ 1759

겸재 정선은 조선 초기의 안견과 후기의 김홍도,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시대 4대가의 한 사람이라 할만큼 우리나라 회화사상 큰 획을 긋는 대가이다. 정선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며 살펴본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삼아 종래의 전통과는 현저하게 다른 자기만의 독자적 화법으로 그려내어 "진경산수(眞景山水)"화풍을 확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정선 이전에도 우리나라의 실재하는 경치를 그리는 [실경산수화]의 풍조는 이미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지만,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는 단순히 우리나라의 산수를 그림의 소재로 택해 그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실경들을 다룸에 있어서 독자적이며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따라서 정선을 위시한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란 우선 우리나라에 실재 하는 산천을 묘사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과,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까지를 포함하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 속 (창강) - 1595 ~ 1668

조선 서화가.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창추(滄醜), 취추(醉醜), 추옹(醜翁), 취병(醉病), 본관은 풍양(豊壤), 수륜(守倫)의 아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 공을 세웠으나 한사코 훈명(勳名)을 사양했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했다. 그림은 영모(翎毛), 매죽(梅竹)을 잘 그렸으며,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장령(掌令), 진선(進善)에 이르렀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果川)의 호계서원 (虎溪書院), 서천(舒川)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金堤)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祭享). [저서] 창강일기(滄江日記) [작품] 그림:묵죽도(墨竹圖), 매작도(梅鵲圖), 지상쌍금도(枝上雙禽圖), 노수처작도 (老樹悽鵲圖). [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인물고 (國朝人物考), 근제집(近齊集),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대동서법(大東書法)

조지운 (매창) - 1637 ~ ?

조선 서화가.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창추(滄醜), 취추(醉醜), 추옹(醜翁), 취병(醉病), 본관은 풍양(豊壤), 수륜(守倫)의 아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 공을 세웠으나 한사코 훈명(勳名)을 사양했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했다. 그림은 영모(翎毛), 매죽(梅竹)을 잘 그렸으며,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장령(掌令), 진선(進善)에 이르렀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果川)의 호계서원 (虎溪書院), 서천(舒川)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金堤)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祭享). [저서] 창강일기(滄江日記) [작품] 그림:묵죽도(墨竹圖), 매작도(梅鵲圖), 지상쌍금도(枝上雙禽圖), 노수처작도 (老樹悽鵲圖). [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인물고 (國朝人物考), 근제집(近齊集),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대동서법(大東書法)

최 북 (호생관) - 1721 ~ 1769

최북은 괴팍한 성격과 기이한 행동, 심한 주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금강산에 갔더거 구룡연에서 경치에 취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에서 호생관(毫生館)이라는 호를 지었고 또 이름의 <北 >자를 잘라 七七(칠칠이)라고 자를 삼았다. 그는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과 교유하였고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필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들은 그의 괴팍한 성격과 직업화가로서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대개가 남종화 계통의 그림들이 많다.

함윤덕 - 조선중기

함윤덕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지만, 생몰 연대는 물론 자나 호마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윤두서가 그의 그림을 평하면서 구도나 채색이 역시 원수(院手)라고 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그가 도화원(圖畵院), 즉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솜씨가 뛰어났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유작인 〈기려도(騎驢圖)〉를 보면, 그가 인물, 동물, 산수 모두를 잘 그렸던 화가임을 알 수 있다.

허건 (남농) 1908 ~ 1987

허건은 조부인 소치(小癡) 허련(許鍊)과 부친 미산(米山) 허형(許瀅)을 이어 남종문인화를 현대적 화풍으로 승화시켜 ‘신남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구어낸 화가로서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남농(南農)으로 전라남도 진도 출신이다.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의 손자이자 미산 허형의 5남 중 넷째아들이다. 1926년 결혼한 부인 남양 홍씨 홍막녀(洪莫汝)와의 사이에 3남을 두었다. 조부 허련이 진도군의 첨찰산 아래 세운 운림산방에서 태어나 강진 병영과 목포 등지에서 살았다. 1927년에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고, 부친 허형으로부터 산수화와 사군자를 배웠다. 1987년 11월 5일 향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930년에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산수화로 입선한 이래 13회에 걸쳐 입선을 하였고, 1944년에는 「목포일우(木逋一遇)」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였다. 1952년부터는 국전에 참가하여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선정되었고,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허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기에는 가전화풍인 소치 허련의 화풍을 따름으로써 전통회화의 계승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의 문부성 전람회에서 입선한 1940년대에는 채색이 많고 호분을 많이 사용하는 일본 남화풍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유학을 하였던 동생 임인(林人) 허림(許林)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40대 후반에는 실경을 바탕으로 갈묵과 여백, 갈색 톤의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특유의 황토성을 표현하는 화풍을 구축하였다. 1950년대 이후 만년에는 단순한 필선과 수묵담채의 산수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남농식 송수법’이라 불리는 독특한 소나무 그림을 그린 것이 특색이다. 소치에서 미산을 거쳐 내려온 전통 남종문인화의 맥을 이어 허백련(許百鍊)과 더불어 현대 호남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동생과 조카, 손자들에게까지 집안의 화맥을 계승케 하였다.

허련 (소치) 1809 ~ 1892

조선 말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노치(老痴)·석치(石痴). 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일파에 속한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라고 개명(改名)하였고,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이후 헌종의 배려로 1848년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초년에는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화풍을 익혔다.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의 미불(米芾), 원말의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청나라의 석도(石濤) 등을 배우고, 그의 서풍(書風)도 전수받으면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1856년에는 진도에 귀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제작활동에 몰두하였다.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禿筆)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생편한 담채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허형 (미산) 1861 ~ 1938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미산(米山).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아들이다. 허련의 나이 44세에 넷째아들로 태어났고, 초명은 허결(許潔)이었으나 후에 허형(許瀅)으로, 만년에는 다시 허준(許準)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 허련(許鍊)의 재주를 그대로 이어 특별히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능숙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산수 및 목단(牡丹), 노송(老松) 등을 그렸으나 산수보다 사군자(四君子)에 수작(秀作)을 냈다.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63세의 나이로 묵매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화풍은 부드러운 붓놀림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 구성과 수많은 미점으로 명암과 양감을 살려 포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허형의 대표작으로는「미점산수도」, 「사계십곡병」, 「노매일지십곡병」 등이 있다. 두 아들 남농 허건(許楗)과 임전 허림 형제를 통하여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우게 하였으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도 유년시절 허형에게 그림을 배우는 등 가문의 화맥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황집중 (영곡) - 1533 ~ ?

조선 화가. 자는 시망(時望), 호는 영곡(影谷), 비목당(卑牧堂), 본관은 창원(昌原). 군수(郡守) 인(璘)의 아들. 1576년(굽?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은 지내지 않았다. 특히 포도를 잘 그려 당시 이정의 대나무, 어몽룡의 매화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작품] 묵포도도(墨葡萄圖) [문헌] 동국문헌서가편(東國文獻書家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