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도 고흐처럼 화가로서 비교적 늦게 출발하였다. 그의 부모가 일찍이 페루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자란다. 후일 그의 이국적인 미술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관심은 아마 페루에서 자란 소년기의 경험에서 연유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처음엔 파리의 부유한 주식중매인이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또 근대 회화 수집가로 시작했다.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1876년경으로, 마네, 르느와르, 모네, 피사로, 세잔느의 작품을 사 모으면서 시작된 미술에 대한 관심은 곧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35세 때, 본격적으로 미술에 전념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러 실업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족과도 결별하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많은 모순들이 유럽의 문화속에서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앗아가버렸다는 고갱의 확신은 "양식"이나 "단순한 기교"를 넘어선 인간의 열정처럼 힘차고 강렬한 그 어떤 것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 고갱은 프랑스 서부 브리타뉴 지방의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는 신앙에 관한 그림은 그릴 수 있었지만, 신앙에 의해 그릴수 없는 한계를 넘기위해 2년후, 그곳을 떠나 문명에 때묻지 않은 생활을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의 그림은 어떤 의미에선 인상주의을 넘어선 더 대담한 진전을 보인다. 형태의 운곽선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하며 토착민들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담아냈다. 1889년 봄, 파리의 카페 볼피니에서 전시회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들은 "인상주의와 종합주의의 그룹"(L"Exposition de peintures du groupe impressionnosteet synthetiste) 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전시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 전시회의 그림들은 실제로 인상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고갱은 종합주의라는 단어에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진 않지만, 외형의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상상과 실제의 경험이 종합된, 보이지 않고 감추어진 세계의 의미를 회화적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즉, 강렬한 색면과 굵은 선, 단순화된 형태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관적인 의미와 감정을 표현하 려는 경향이라고 정리할수 있다.
네델란드 태생의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는 혹독한 고독과 정신분열증, 권총 자살로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한때 벨기에와 영국의 광산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만큼 신앙심이 돈독했으나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고흐가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것은 1881년,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일생에 단 두 점의 그림만을 팔수 있었던 고흐에게 동생 테오는 혈육의 관계를 넘어 고흐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난한 삶이었지만 형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평생의 동반자로 고흐가 약 10년의 작품활동기간 중에 유화, 드로잉, 수채화 등 천 여점에 달하는 왕성한 작업을 할수있도록 도와준 가장 가까운 조력자였다. 1872년부터 동생 테오에게 보낸 650통에 달하는데 편지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고흐의 고뇌와 화가로서의 열정, 절망적인 고독, 타인과 사귀고자 했던 간절한 열망을 느낄수 있다. 또한 그의 불 같은 열정으로 작품을 제작했던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담고 있다. 초기의 고흐의 작품은 밀레와 바르비종화파의 영향으로 소박한 농촌 풍경이나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통해 경건한 종교적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동생 테오를 따라 파리에 머문 고흐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분을 쌓으며 새로운 양식들을 답습한다. 쇠라의 점묘법을 수용한 고흐는 이후 그의 붓놀림에서 강한 텃치와 세분화된 강렬한 색채의 활용으로 발전한다. 혹독한 고독속에서도 고흐에게 그림은 자신의 고통과 희열,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 담겨있는 인간애를 표현할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밀밭위의 까마귀]작품은 고흐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으로 칡흑같이 어두운 하늘에는 폭풍우가 몰아 칠듯하고, 격렬한 봇질의 밀밭위로 까마귀가 날고 있다 마치 절박한 종말을 예견하듯. 파리 시내에 열차로 한시간 남짓, 그가 즐겨 그리던 오베르 교회를 왼편으로 너른 밀밭이 펼쳐있다. 평생을 그의 곁을 지켜주던 동생 테오와 이제는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속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드가는 인상파 그룹에 참여하였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인상파화가라고 할 수 없는 화가이다. 물체를 에워싸는 광선에 의한 분위기를 잡으려는 인상파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엄격한 사실주의정신을 끝내 지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고전파의 대가인 앵그르를 숭배하였던 드가의 엄격하고 사실적인 대생은 고전의 명화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인상파 화가들이 야외에서의 외광 풍경에 몰두했던것과는 달리 드가는 실내의 인물 묘사에 주력했다. 정물화나 풍경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움직이는 인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인간의 동작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동작인 발레를 많이 다루었다. 드가의 작품의 모티브는 대부분 현실에서 구하면서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상류사회의 생활상을 자주 그리는데 반해, 시민이나 하층 계급의 생활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발레 장면과 곡예사, 목욕하는 여인, 경마장 풍경 등은 드가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테마이다.
프랑스 루앙 근교 태생. 1911년 퀴비슴(입체주의) 운동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가 뉴욕의 "아모리 쇼"에 출품되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이른 바 "반예술적"작품을 발표하여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중 하나로, 1917년 4월10일, 뉴욕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선 미술사상 가장 센세이 셔널한 반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앙데팡당전.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젊고 패기만만한 작가들의 전시회이긴 했다. 그러나 전시장에 남성용 변기 하나가 덩그러니 등장한 것이다. 고상한 전시장 에 변기라니. 주최측은 경악했다. 출품자는 이 전시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마르셀 뒤샹. 그는 어느 공중변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를 떼어다 "샘물(Fountain)"이란 제목을 붙이고 "R MUTT"란 이름으로 사인, 당당하게 작품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R MUTT"란 것도 실은 뉴욕 변기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다른 운영위원들은 난감했다. 이 작품을 걸 것인가, 바닥에 놓을 것인 가. 아니, 이런 작품을 전시해도 될 것인가. 변기는 결국 전시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에 폐기되는 운명에 처했다. 전시가 끝나자 뒤샹은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만든 잡지 "눈 먼 사람" (The Blind Man"을 통해 기다렸다는 듯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미국인 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6달러라는 참가비를 낸 모든 화가는 작품을 전시할 권리를 갖는다. 리 처드 머트씨의 작품 "샘물"을 거부한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 혹 자는 그것이 부도덕하고 상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머트씨의 샘물은 부도덕하지 않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사용하여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 아래, 그것이 갖고 있던 실용적 의미가 사라 지도록 배치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소재의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냈다.". 마르셀 뒤샹(1887∼1968). 20세기의 숱한 미술가들 가운데 그만큼 생전 의 무명과 사후의 영광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만년에 미술가를 포기하고 체스(서양장기) 연구에 생애를 바쳤다. 그러나 뒤샹이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미술을 만든 두 거장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 람은 별로 없다. 뒤샹의 변기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예술가의 정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뒤샹은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뒤샹의 미학은 물건이 넘쳐나는 대량생산 시대의 미학 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샹으로 인해 20세기의 미술 관람객들 은 눈 앞의 작품 뿐 아니라 뒤에 숨은 작가의 정신까지 이해해야 하는 난 감 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찌그러진 자동차, 푸주간 의 고깃덩이,살아있는 뱀이 예술작품으로 전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네가 순수 시각의 문제들에 몰두한 반면,르느와르는 인간과 인간의 상호 관계와 물리적인 접촉에 관심을 가졌다. 누구보다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매우 행복한 기질로 <삶의 기쁨>을 화면에 채웠다. 따뜻한 색채로 펼쳐지는 일상의 그림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좋아하는 것일게다. 모네와 더불어 장수를 누렸던 르느와르는 초기 인상주의 경향의 그림과 말년의 그림은 다소 차이를 보여준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기법면에서 변화를 겪는다. 아마도 이 여행에서 섭렵한 많은 고전주의 작품들에서 형태와 볼륨감을 새로이 도입하여 초기의 그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작품들을 그리게된다.
르동도 모로와 마찬가지로 꿈과 상상력에 사로 잡혀 있었으나 그의 심상은 훨씬 더 개성적이었다. 무의식과 신비의 세계를 작가 자신에 의해 이미지가 창조되고 사용되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가장 순수한 상징주의자로 여겨지고 있다. 처음에 건축공부를 하면서 얻게된 경험과 현미경으로 식물과 곤충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던 그의 관심사는 후일 그의 그림에서 독특한 그만의 구조나 형태 그리고 공간감으로 표출되었다. 그의 작품은 거의가 석판화나 에칭, 그리고 목판화들로, [꿈속에서](1879),[에드가 알렌포우 에게](1882), [고야에게 바침](1885), [성 요한 계시록](1890) 등의 일련의 작품에서 사람의 얼굴 을 한 곤충이나 꽃, 떠있는 눈, 잘려진 사람의 얼굴 등을 그렸는데 이는 꿈이나 환상에서나 볼 수 있는 설명되지 않는 기괴하고 홀린 것 같은 형상을 등장시켰다.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인상주의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화면에 옮긴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모네는 파리의 시가지 모습이나 [생 라자르 역]같은 산업화된 주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좀 더 순수한 풍경화에 심취한다. 1883년 모네는 파리를 떠나 파리 교외의 지베르니(Giverny)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주변의 소재에 더 관심을 기울여 포플라, 건초더미, 루앙대성당과 같이 하나의 소재를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말년의 연작중에서 모네가 가장 열중했던 소재는 지베르니 정원의 연못에 핀 [수련]이었다 그는 정원에 일본식 다리를 설치해 놓고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수련을 그렸다. 수련 연작은 수면 위에 핀 꽃과 잎, 또 물위에 반영된 자연과 광선 , 물 밑의 세계가 종합된 일종의 소우주의 의미를 가진다. 모네는 점점 작품의 크기를 대형화하거나 2폭, 3폭으로 연속시켰다. 후기에 그린 수련작품들은 화면에서 수평선이 없어져 버리고 화면은 완전히 거울과 같이 평면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원근법은 모호해지고 화면은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색채로 충만한 서정적 추상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그의 수련 연작은 회화가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지 않아도, 일화적이거나 문학적 내용을 암시하지 않아도 또 사상을 표현하지 않아도, 순수하게 화면의 색채 하모니와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수있음을 보여준다.
어머니를 모시고 평생을 독신으로 산 것으로 알려진 모로는 대부분의시간을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면서 지낸 괴팍한 성격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교육을 받았고 1850년대의 < 살롱>에서 활약을 했지만 1886 년 이후에는 어느곳에서도 전시를 하지 않았다. 모로는 문학, 철학, 고고학에 몰두하였을뿐 만아니라 신학과 카톨릭, 고대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지적 탐구는 신비스럽고 이국 적이면서 정교한 그의 미술에 잘 반영되고 있다. 모로의 양식은 고전주의적 형식을 따르고 있고, 당시 상징주의 화가들이 많이 다루었던 요부적인 여성 이미지의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특정한 여인을 그리기보다는 살로메, 세멜에, 메데아와 같은 집념적인 사랑과 결국엔 파멸로 치닫는 숙명적인 여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소재로 다루었다. 여성의 미(美 )가 난폭할수도 있으며 미의 유혹이 남성을 복수와 욕망 그리고 죽음으로 이끌어감을 상징하는 이같은 그림들은 당시 개선되어 가고 있던 여성의 권리와 이미지의 변화에 맞서 사회적인 흐름과는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모로의 양식은 후기 작품에서 대담한 화면 처리로 거의 표현주의에 가까워진다. 그의 양식은 1891년부터 가르치던 국립미술학교의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는데 그중 마티스, 루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는 유럽 북구 화가들 중에 누구보다도 강한 개성과 독창력으로 세기말의 인간의 자각과 내면 세계를 조명한 화가이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여읜 경험은 예민한 성격의 뭉크에 큰 충격이었고 이후 죽음과 병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 줄곧 등장하는 주제가 된다. 1889년 뭉크가 정부 장학금으로 파리에 왔을 때 처음에는 인상주의를, 다음에는 고갱의 평면적 색채나 선의 영향을 받았다. 뭉크의 주제는 현대사회에서의 인간 내면의 감정과 소외감, 현대인의 정신적 불안, 성(性)의 심리적 또는 육체적 갈등과 같은 생(生)에 대한 인간의 내면적 심리와 갈등을 다루었다. 1900년을 전후로 왕성한 활동을 한 뭉크는 거친 표면처리와 휘감기는 듯한 선과 색채는 이후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부한 고전적 교양을 겸비한 화가로 [앙티미스트], [색채의 마술사]라는 명칭을 얻는다. 보나르는 다른 나비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생활에서 모티브를 찾았고, 구도나 색채는 평면적으로 처리했다. 보나르는 여러분야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보여주었는데 광고 포스타, 잡지의 삽화, 석판화집, 스테인 글라스의 밑그림 등 등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30년대 그의 그림은 완숙미를 더하게 되고 그의 그림은 이미 사실주의의 영역을 벗어나 일종의 추상화되고 상징화되는 경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보나르의 미술은 즐거운 색채의 미묘한 톤과 하모니를 추구하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세대에 영향을 주게 된다.
뷔야르는 보나르와 함께 앙티미스트(Intimist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화가로 안락한 중산층의 생활을, 특히 실내의 광경을 작은 터치와 반짝이는 색채로 그렸다. 이러한 풍경은 인상주의 그림과는 달리 조용하고 은밀한 분위기가 느껴져 앙티미스트 (Intimiste)-친밀파라는 명칭을 얻는다. 원근법을 무시한 대담한 구성력과 순간적인 동작의 포착, 실내벽지와 의상의 무늬, 커튼 등에 쓰인 장식성은 뷔야르 그림의 특징이다.
인상주의경향에서 광선과 색채를 체계적으로 구사하는 미술을 "신인상주의"라고 부르는데 시냑은 이 신인상주의의 이론가로서 신인상주의를 설명하고 널리 알리는데 훌륭한 전파자의 역할을 해내었다. 시냑은 신인상주의의 목적은 빛과 색채의 조화를 최대한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냑은 1899년 [들라크로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란 글 속에서 들라크로아가 인상파에 미친 색채론의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들라크로아의 색채론에 대한 설명을 보색관계의 의식적인 적용과 색채를 직접 화면에서 대치시킴으로써 생생한 빛의 효과를 얻으려고 했던 수법이야말로 인상파 회화의 출발점이라고 기술해 주고 있다. 화가의 개인적인 감수성을 극히 제한하고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교리적인 방법과 이념으로 신인상주의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신인상주의에 끝까지 남았던 화가가 폴 시냑으로 그는 쇠라의 점묘범을 모자이크처럼 네모의 색채로 확대시켜 색채 대조를 강화시키고 엄격한 구성 체계를 고집하였다. 시냑의 그림은 색채 자체의 추상적 패턴이 강조되어 화면은 매우 장식적이 되었다.
32세의 젊은 나에로 홀연 세상을 떠난 쇠라가 남긴 주요 작품은 불과 몇점에 지나지 않으나 그의 미술은 많은 주종자를 낳았다. 쇠라는 과학적 접근 방법을 해결책으로 보고 순수하고 정확한 색채분활로 화면을 참조, 광선으로서으 색채와 물감으로서의 색채차이르 깨닫게 된다. 즉 광선에서는 보색을 섞으면 흰색이 되나 물감에서는 회색이 된다는 사실은 당시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순수 원색을 분할하여 규칙적인 점으로 찍어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축하려고 했다. 쇠라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콩테크레용을 이용한 소묘나 유화 스케치를 통해 명암대조를 습작,그가 과학적 분할주의를 처음으로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1883-1884년경부터이다.
세뤼지에는 나비파 형성과정에서 산파역할을 한 사람으로 재능과 지성, 그리고 지도력을 겸비한 인물로 고갱의 영량을 크게 받아 그의 미술에 일대 전환을 갖게 된다. 미술이 더 이상 자연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색채와 패턴으로 표현하게 된다. 세뤼지에를 중심으로 모리스 드니, 루셀, 뷔야르, 보나르, 마이욜 등 진취적인 미술에 뜻을 같이 하는 화가들이 나비파를 결성하게 된다. 그 중 마이욜은 조각가 로 변신하여 그룹을 떠났고,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로트렉은 이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광선과 그 속에서보여지는 유동성을 포착하려는데 비해 세잔느는 사물 형태의 대조나 견고함 그리고 구성효과를 강조한 작가이다.즉, 세잔느의 눈에 비친 인상주의의 어수선함을 탈피하며, 자연을 충실하게 관찰하면서도 회화의 독자성(질서와 구성)이 자연(사물)에 지배당하지 않게 하려는 세심한 조정과정에 힘쓴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릴만큼 그의 회화세계에대한 견해는 이후 화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자연의 형태를 애써 왜곡시키려 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시각에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과감히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면서 질서있는 화면 배치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이것은`정확한 소묘"가 아니더라도 견고함과 깊이감을 살릴 수 있다는 표현의 대전환을 이룬다.
.벨기에의 오스텐드 출신의 앙소르는 잠시 브뤼셀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다시 오스텐드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주로 벨기에에서만 활동하였다. 앙소르의 초기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채의 풍경화나 정물화였는데 1885년경부터 그의 독자적인 주제들이 자리잡게 된다. 앙소르는 어려서부터 선물가게에서 늘 보아오던 마스크와 인형을 자신의 작품속에 등장 시켜 인간의 이중적 삶을 동화속 줄거리와 같은 상상력과 결합시켜 표출시키는 도구로 이용했다. 가면아라는 것은 위협적일 수도 있으며 가면을 쓴 사람의 정체를 노출시키지않는 이미지로써 앙소르는 그의 그림에서 숨겨진 욕망이나 의식의 반영, 부패와 위선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숭효는 화원으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백달(伯達)이다. 화가인 이상좌(李上佐)의 아들이며 나옹 이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고 작품도 드물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 아들인 이정은 작은아버지인 이흥효의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작품이 드물어 화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어부도>를 통해 보면,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절파 화풍을 구사했으며 그림에 상당한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상파 화가들이 천천히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미국인들은 유럽에서보다 더 면저 이 새로운 양식에 반응을 보였다. 휘슬러는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로웰 출생으로 그림공부를 하러 1855년에 파리에 도착, 4년 후에 런던으로 옮겨가 거기서 그의 여생을 보낸다. 그러나 1860년대에 프랑스를 방문하여, 상승하는 인상파 운동에 밀접히 관여하였다. 1863년 <살롱 낙선전>에 마네와 함께 출품한 휘슬러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 과 마찬가지로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휘슬러는 엄격한 의미에는 인상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관된 관심사는 빛과 색채의 효과에 있다기보다는 미묘한 색면구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고, 그것을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