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RENAISSANCE)

15~16세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미술. 오늘날 통념적인 르네상스 미술의 시기는 피렌체대성당의 돔을 착공한
1420년을 상한 으로하고, 하한은 마니레리스모 옮겨가는 1525~30년경으로 잡고 있다. (르네상스의 의미와 미술)19세기
이후, 15~16세기에 유럽의 문화 현상을 널리 파악하는 개념이 된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을 듯하는데,
이말은 어원은 역사적으로 보면 이탈리아에서 미술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14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및 역사가 빌라니 등이 잃어버린 고대의 문예 및 예술을 새시대에 재현한다는 뜻으로 이탈리아어의 재생.
부활을 의미하는 리나시타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다시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 기베르티와 알베르티, 필라레터 등의
저술에도 그러한 사관이 계승되어 있었으나,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바사리는 그의 저서(이탈리아 미술가 열전) (1550년 초판)
에서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증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후 거친 고트인에 의하여 `독일양식`,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진틴양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 '조토 및 조각가 피사노와 디 캄비오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신티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르네상스라고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이어서 영어'독일어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토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어이며, 더욱이 그 개념이 형성된 단서는 그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지각과 의욕을 보여준 미술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대의 재생과 이탈리아

당시 이탈리아인은 고대의 가장 정통적인 계승자라는 자각 아래 타국민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대에 대한 동경과
향수에빠져서 조상의 위업을 회상하는 민족적 자부심과 그 위업을 재현할 후예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 운동을 펴나갔다.
물론 고전 고대의 부흥이라는 현상이 중세에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의 이탈리아인은 자기 자신과 고대인 사이에
`1000년의 암흑시대`라는 개념을 삽입함으로써 고전 고대의 세계를 머나먼 과거로 보고 취급한 점이며, 이와 같은
르네상스의 인식은 당연한 귀결로 부정적인 중세개념을 잉태케 하였다. 그런데 이미 14세기 말의 화가 치에니니는 그의
(예술의 서)(1400년경)에 조토의 회화활동 가운데 그 때까지도 없었던 자연탐구에 의한 새로운 풍조와 고대의 재흥을
인정하였다 이 자연탐구에 의한 사실과 앞에서 든 고대연구를 2개의 큰 기둥으로 삼아 극히 이지적'논리적으로 추진해나간
르네상스 미술은 우선저치' 경제의 근대화에 따라 시민의식이 왕성한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그 후 이탈리아
각 도시로 파급되었고, 다시 16세기 이후에는 알프스 이북의 여러 국가까지 퍼져나갔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싹은 이미 13세기~14세기 초에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 카발리니, 조각가 피사노와 캄비오등의 활동으로 명확하게
인정된다. 이것이 조기 르네상스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그 후 국제적인 북방 고딕 양식으로 단절되었으며 그것을
극복하여 참다운 르네상스 미술로서 의식상으로나 양식으로나 본격적인 개화를 본 것은 1420년대부터이다. 이것은
피렌체 출생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 조각가 도나텔로, 화가 마사치오 등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3인의 혁신자

건축에서는 미와 힘을 통합하여 조화와 율동의 공간질서를 드러낸 브루넬레스키에 의하여 비롯된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텔피오레(꽃의성모마리아) 대성당의 붉은색 대형 돔은 역학상의 난 점음을 훌륭하게 해결한 걸작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건축 중에서 빛나는 최초의 수확이기도 하였다. 또한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기술을 채용하여 돔을
설계하고, 조화를 이룬 당당한 불륨을 공간에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고딕건축의 수직적 상승성을 배제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장중한 공간을 살린 르네상스 건축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조각에서는 조각을 건축의 부속적 지위로부터
해방하여 조각 본래의 양체성을 올바로 자각하고 고딕양식으로 회화화한 조각을 정도로 되돌려 고전정신과 사실주의를
융합시킨 도나텔로에 의하여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성 조르조)와(다비데)나(성고)를 비롯한 대표작은
모두가 고아한 고전적 품위와 사실에 따른 엄격한 양체성의 훌륭한 융합이다. 그리하여 파도바의 일 세인트성당 앞 광장에
서있는 (가타멜리타 장군 기마상)은 장중한 건축적 구성 가운데 사람과 말이 일체가 되어 위용이 넘친 용감한 자태, 상과
대좌의 뛰어난 균형, 또한 말을 탄 장군의 날카로운 성격의 각출로 그의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두드러진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회화에서는 15세기 초기임에도 이미 지배적인 국제 고딕 양식의 유행을 물리치고 피렌체화파 본래의
힘찬 조형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마사치오에 의하여 르네상스의 회화는 막이 열렸다. 앞의 두 위대한 선배에게서 많은
5장면 정도의 벽화는 조토의 조형적인 엄격성을 훌륭하게 재생'발전시킨 작품이며, 당대의 수준을 능가한 획기적인
양식이었다. 27세 요절하였으나, 그가 피렌체화파에 끼친 영향은 컸다.

미술활동의 전개

그 후 건축에서는 알베르티, 필라레테, 미켈로조, 마야노 형제, 상갈로를 거쳐서 브라만테에 이르고, 조각에서는 반코,
로비아일족, 세티냐노, 로셀리나 형제,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베르톨도를 거쳐서 미칼렌젤로에 이르고, 회화에서는
우첼로, 안젤리코, 리피, 카스타뇨, 베네치아노, 발도비네티,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등을 거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르렀다. 단적으로 말하여, 15세기 초의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의 주도 아래 각 분야와도 간말하 교류하면서 원근법과
인체균형론 등의 여러 탐구와 그를 위한 기법을 확대하여 자연주의적 주류 아래 전개해 나갔다. 더욱이 피렌체에서 탄생
' 양육된 르네상스 미술은 앞의 3대 예술가를 비롯한 같은 파의 미술가들이 이탈리아의 각지에 초대받아 여러 곳에서
눈부시게 활약했기 때문에 지방에도 확산되어, 15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각기 지방적 특색을 보유하면서
새시대의 예술운동에 참여한 유파가 서로 그 특색을 겨루어 활기를 띠었다. 예를 들면 토스카나와 에밀리아 지방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그의 문화생인 멜로조 다 포를린, 루카시뇨렐리, 페루지아의 두초와 페루지노, 핀토리키오,
우르비노의 루치아노 라우라나, 만토바의 만테냐, 페라라의 코스메 투라, 코사, 볼로냐의 프란치아, 파피아의 아마데오,
나폴리에서의 라우라나, 베네치아에서의 벨리니 일가와 롬바르도 부자, 안토넬로 다 메시나, 크리벨리 등의 활동이
현저하였고, 거의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각기의 분야에서 유니크한 예술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전양식의 달성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이룬 객관주의는 1450년 전후에 태어난 세대의 미술가들에 의하여 달성되었으나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것을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전아한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그의 천재성은 15세기 말에 이미 그 세기의 객관사실을 심화하여 주관적인 정신
내용과의 통일을 기도하여(최후의 만찬)을 비롯하여 그 후의 여러작품에서 이상주의적 고전양식을 완성하게 하였다.
이어 70년과 80년대에 출생한 미술가들, 예를 들면 피렌체파의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미켈란젤로, 사르토, 우르비노 출생의
라파엘로, 베네치아파의 조르조네'티치아노'피옴보, 에밀리아파의 코레지오, 시에나파의 소도마 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실현한 업적을 계승하고, 고대미술에서도 많은것을 배워 대상을 주관적으로 잘 순화하여 우연적이고 특수적인
것을 제거, 고전적 이상을 추구하여 여기에 고전양식의 전성기를 구축하였다. 이때가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하는 16세기
초의 4반기 이다.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는 이시기의 대표적 미술가로서 각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못지않는 개성적인 고전적 예술을 이루어놓았다.

말기의 두 경향과 북유럽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당시의 국제정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겹쳐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고전적이고 조화있는 양식이 무너지면서 동적인 바로크 양식의 싹(프로토 바로크_이 나타났다. 한편,
마니에리스모라 불리는 주자주의적 주관주의적 양식이 나타나 16세기 중엽에는 건축'조각'회화의 주류가 되었다.
특히 피렌체파의 화가 폰토르모와 브론치노, 바사리, 조각가인 첼리니, 안마나티, 장 볼로냐 등을 대표적인 마니에리스트로
들 수 있으나, 페라라파의 도소 도시, 에밀리아파의 파르미자니노, 베네치아파의 틴토레토 등도 만년에는 마니에리스모로
옮겨갔다. 또 베네치아파의 최후를 장식한 파올로 베로네제 바로크적 경향으로 끝나, 결국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미술은16세기 중엽 에 구 경향이 교차하면서 실질적으로 끝났다. 한편, 알프스 이북의 여러 국가에서도 15세기 말 이후
뒤러 등의 북방 여러나라에도 전파되어 16세기 중엽부터 르네상스적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본래부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역사적 현상으로, 고대 미술이나 학예를 갖지 않은 북방 여러나라의 그러한 현상을 르네상스 본래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리이며, 동시대적 파악은 가능할지 모르나 특별히 북방 르네상스라는 개념으로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나리자, 비너스의탄생, 성모자상, 우리비노의비너스, 정원의성모

바로크 (Baroque)

바로크 미술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롤릭 국각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바로크는 예술에 관한 문헌에서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언어로 그 어원은 불확실하다.
바로크가 "불규칙적"이하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그 단어가 불규칙적한 진주라는 뜻은 포루투칼어에서 유해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말은 부르크하르트와 봘플린에 의해 미술사 및 비평 용어로 사용되면서 전문적인 용어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바로크는 세가지 중요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첫째, 미술사에서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 즉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의 양식을 말한다.
둘째, 특정한 양식에 대한 관념에 의해 특정짓는 일정 기간- 보통17세기를 말한다. 따라서 "바로크 시대, 바로크 정치,
"이라는 말이 있을수 있다. 셋째, "바로크"라는 말은 지금은 과거의 경멸적인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아직도
예술에 관한 문헌과 비전문적인 의미의 일상에서 "변덕스러운" "장식이 지나친", 현란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왕권의 번영과 함께 등장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
성당 건축과 함께 궁전 건축이 중심이었는데 베르시아유 궁전은 대표적인 예이다. 명암은 감한 데바를 이용하여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주제가 등장한 회화는 풍경화, 정물화 세속적 인물화가 이시대부터 시작도이었다.
바로크 예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과는
다른 것이지만 매너리즘의 종종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점이나 로코코의 신경질적인 단편성 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균형과 공통되는 점이 더 많다.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하게 하는 것이 바로크 작품의 특징이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형'완결성등에 대해 경탄과 현혹을 지향하여 양감, 광채, 동감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류롭고 유연한 접합부분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의복의 표현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 있어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버브,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였던 카라밧지오는 측면
광선에 의한 명암의 강한 데비를 나타냈고, 주로 종교화를 그렸던 엘그레코는 (성모마리아의 승천)(십자가의 크리스트)를
그렸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벨리스케즈는 (왕녀마가렛)(시녀들)을 그렸고, 풍만한 육체와 풍요로운 색채로 웅장한
구성과 생동하는 필력을 구사했던 루벤스도 유명하다. 집중적인 광선의 표현과 깊은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렘브란트의 (야경) (자화상)등은 바로크 미술의 절정이다. 그외에 푸생, 반다이크, 함스, 베르메르등이 있다.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밧지오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풍습으로의 복귀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렛지오의 예술에서
이세 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로로, 또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다비드, 삼미신, 시녀들, 야경, 자화상

로코코 (Rococo)

섬세하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것이 특징인 로코코 미술은 루이 15세 시대의 특징적인 장식 예술 및 장식품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로코코는 1700년경 프랑스에서 등장하여 18세기말 복고풍에 밀려 후퇴할 때까지 유럽을 휩쓸었다.
로코코라는 말은 "조약동"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로카이유"에서 파생된 것으로 미술사가들에 의해 객관적인 의미에서
일정한 통일과 조화를 갖고 있는 예술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일컫는데 사용한다. 부서지기 쉬운 호화로운 장식,
사소한 주제, 목가적인 시. 규모는 작으나 정밀한 조각등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이 로코코의 특징이다.
로코코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부정형이나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따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크가 남성적, 의지적임에 반하여 로코코는 여성적, 감각적이라고 할수있다.
로코코 건축의 최초의 작품은 로베르 드 코트의 베르사이유 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 보프랑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어서 오베르, 가브리엘 부자와 크루토느등이 활약하였고 보프랑이 만든 오테르 드 스비즈의 타원형 샬롱, 가브리엘의
풍텐블로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이유 궁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 취미를 잘 전해주고 있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의(시테르 섬으로의 탈출)에서 비롯된다. 그는 색과 선이 융합되고 서로 연관되는 섬세, 훗날 회화적
장르라 불리는 이 때의 특징은 비 대칭적인 장식의 사용이다. 피노가 실내 장식에서 그리고 메소니에가 은공예에서
처음 시도했으며, 조각가인 몽돈과 퀴빌리에가 그 뒤를 이었다. 로코코라는 수식어를 붙일수있는 대표적인 화가들로
와토와 부세가 있다.

프랑스에서의 로코코의 퇴조는 신고전주의의 부활동에 선행되어 일어났다.
18세기 중반. 코겡과 블로뎅은 "회화적 장르"의 극단적인 사치에서 돌아서 고전적 풍습의 모방이 아닌 이전 세기의
"좋은취향"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세공인 베르벨크트, 조각가 루소의 영향아래 좀 더 보수적인 형태가 되면서
루이 15세기 통치 말기까지 급격한 단절없이 계속되었다.
로코코는 고대풍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새로운 취향의 고전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 혁명과 함께 새로운 시민 계급과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대두되면서 전세대의 예술과 도덕의 경박성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로코코는 파리에서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로 전파되어 각 나라의 특성이 가야되고 지역에
따라 많은 변형이 생겨나게 된다. 영국에서는 가구의 경우 제외하고는 로코코가 거의 유행되지 않았지만, 독일에서는
1720년경부터 약 50년간 로코코양식이 건축계를 지배하였다. 다만 독일의 로코코 양식에는 바로크적인 장중미가 많이
남아 있어 그결과 장중한 건축과 경쾌하고 화려한 내부 장식의 색다른 대조를 보였다.

목욕하는여인들, 시테르섬의출항, 물가, 부엌, 새우파는소녀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형성되던 미술양식, 르네상스시대의 광의의 고전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보통'신고전주의 미술' 이라고 한다. 이협의의 고전주의란, 18세기 중엽에 있던 품페이' 헤라클레네옴'파에스톰 등의
고대건축 발굴로 생긴 말이다. 즉 이발굴로 그리스 로마' 중세' 르네상스의 차이가 분명해지면서 종래에 교과서처럼
여겨오던 르네상스의 건축이론에서 벗어나, 고대건축의 실례를 표본으로 삼은 새로운 연구와 발견이 프랑스' 영국의
고고학자와 건축가에 의해 로마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 고전주의 미술의 양식을 확립할 사람으로는 프랑스의 수플로, 영국의 스마크, 독일의 K.F.싱켈을 들 수 있다. 또한
레싱과 빙켈만의 고대 연구가' 고대에의 동경이라는 경향을 낳았는데, 조각에서는 카노바와 다네커 등이, 회화에서는
N푸생, 라 투르 냉형제와 나폴레옹의 출현과 함께 고대로마에 대한 향수가 고전 취미를 낳으면서 로마의 역사나
나폴레옹의 업적에서 취재한 다비드에 의해 고전주의 회화의 양식이 완성되었다. 이 양식은 그 후 영그르와프뤼동에
계승되어 프랑스 회화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고전주의 미술의 특색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명확한 표현 형식과
내용의 균형 등을 중시한 데 있으며, 특히 조형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형상의 입체적
형성등이 중요시한다.

여인들의중재, 암살당한마라, 오달리스크, 터키의욕탕, 형재의 맹세

낭만주의 (Romanticism)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걸쳐 전 유럽에 탄생한 예술적 경향이다.
개성을 구가하고 자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상상과 무한적인 것을 동경하는 주관적. 감정적인 태도가 두드러진 특색이다.
미술상으로는 고전주의, 바로크에 대해서도 이경향은 언급되지만, 일정하고도 명확한 양식을 낳은것은 아니다.
조각 분야에서는 프랑스와 뤄드, 건축에서는 이른바 신고딕 양식과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회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주에 대한 반동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의 그로에서 시작되어 제리코를 거쳐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향 또는 이국 취미에 의한 후기 작업으로 낭만주의의 한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낭만주의의
이와 같은 특색은 회화사상 독일 중세 혹은 초기 르네상스의 종교적 정열과 결합된 작품, 나질레파, 룬게, 프리드리히의
범신론적 풍경화 속에서도 찻아 볼 수 있다.

한편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보다 복잡다단해서 19세기의 그것처럼 크게 분류될 수는 없다. 비합리적이고
공상적인 예술은 어떤 면에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공상만을 즐기는 낭만적인 경향, 혹은 감상적이라는 의미에서 현대 미술의 낭만주의자를 든다면 장 뤼르사, 레오팔드
쉬르바지등이 있으나 이들의 공상은 초현실주의와 같이 비유, 암시, 변모가 아니라 단지 신선하고 아름다운 화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이다. 뤼르사의 공예 방면의 탁월한 수환은 그의 풍부한 낭만성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샤갈의
예술도 사실에 의하지 않은 환상이란 의미에서 낭만주의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샤갈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사실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또 크리스티 앙 베르망 형제 파벨 첼리체프의 예술에는 낭만적인 강상성이 엿보여 사실주의
화가라고 부르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그린 작가로, 그것은
이들의 신휴머니즘적 모렬의 위치를 보여준 것이다.

도자기파는 사람, 마을의 투우, 발코니의마하들, 알바공작부인, 자화상

사실주의 (Realism)

사실주의는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데포로미숑을 행하지 않는
예술조이다.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볼때 사실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 데 비해,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볼때 사실주의는
자연의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지연이라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반아이크 형제, 뒤러,
벨리스케스, 고야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및 공상과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독일에서는 라이플, 벨기에에서는 뫼니에등의 작품에서 리얼리스틱한 생활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는 변질되어 이념과 기법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사진이란 새로운
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실주의가 추구해 온 대상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재현은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화가는 늘 사회와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진부한 외관인의 묘사를
초월하여 새로운 현실상을 그림으로써 이념과 기법으로 분극된 사실주의는 서로 교차하면서 유파를 초월한 미술의
저류를 형성해왔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독이르 멕시코, 미국 소련등지에서 각각
독자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사실주의는 오토 딕스, 게오르게그로츠, 막스 베크만, 케터 콜비츠 등으로 대표된다.
멕시코에서는 1912년 혁명에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 참가했던 시케이로스, 리베라, 오로츠코등의 화가들이 식민지 시대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멕시코적 사실주의인 이른바 "멕시코 르네상스"를 확립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뉴딜
정책하에 실업 구제를 위해 민중 생활 묘사나 벽화 제작에 미술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풍경화파란 일련의 사실주의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부터 뉴 리얼리즘이란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팝아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볼수 있다.
여기세서 사실주의는 반추상적이란 개념은 물론, 전통적인것, 기존의 예술 사조에 대한 가치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말로 쓰인다.

사용의성, 여인과고양이, 잠자는금발의여인, 전원의연인들, 화실

인상주의 (Impressionism)

19세기 후반 주로1860~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상의 주의, 이를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각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 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쳤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뉘앙스의 미묘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같이 빛의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상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아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도
종래의 아카데믹한 작품에 불만을 느낀 몇몇의 개성적인 청년작가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이미 1857년경부터 피사로, 세잔, 기요맹이 차례로 이중 모네는 '아카데미 스위스'에도 출입하여 이들 7명의 화가들은
곧 지기가 되어 매주 목요일에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새로운 회화에 관해 열심히 토론하였다. 이곳에는 그들 외에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 졸라와 그 밖에 시인 .평론가들도
모였다. 그들은 63년 낙선화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식사)로 흑평을 사고, 65년 샬롱에 출품한(올램피아)로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혁신화가 마네를 그들의 수령으로 받들고 밝고 대담한 새로운 회화관으로 해서 크게 계발 되었다.
70년의 프로이센- 프랑스전쟁은 이카페 게르부아의 모임을 자연 해산시켰으나 모네 피사로 사슬레 등이 전쟁을 파하여
런던으로 가서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대 풍경화파의 외광표현을 접한 사실을 벨리스케스 고야. 들라크루아 등
인상파적 기법을 선구적으로 이미 실천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운동의 개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후에 각각 파리로 돌아와 74년 봄 나달의 사진관에서 이 파의 첫 전람회인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 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인상,일출) 이라는 풍경화의 제명을 따서
르루아라는 한 미술기지가 "인상파전람회"라고 하는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지)에 실은 것이 '인상파'명칭을
사용할 만큼 이명칭은 일반화되었다. 이 인상파 그룹과 8회에 걸친 그들 전람회의 경과는 물론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미네는 처음부터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룹의 유력한 작가들이 전람회에 참가한 횟수를 보아도
8회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한 사람은 피사로 단 한 사람뿐, 그 밖의 드가와 모리조는 7회, 기요맹이 6회, 모네와
고갱이 5회, 시슬레와 르누아르가 4회, 세잔은 2회에 불과했다. 쇠라, 시냐크'르동 등은 겨우 마지막 전람회에
등장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소수 화가들의 12년에 걸친 악전고투의 신상파운동이 그다지 통일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평이 호전된 그 시점에서 이전부터 다소 보여왔던 그들의 공통적 사고와
그런데 인상파화가들은 재능과 기질면이 서로 다르듯이, 화풍에 있어서도 결코 한결같지 않았다. 모네'피사로'시술레 등이
그 중에서도 인상파의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낸 작가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역시 시기에 따라 화풍이 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상파화가들이 유형적인 아카데미즘에 반항하고 어떤 관례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미묘한 대기의 인상을 묘사하는 데 전념했다는 점에서는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나타낸 예로서
그들은 앞서 든 화가들 외에도 부댕이나 용킨트 등의 작품에서 찻아볼 수 있는 기법상의 특색에서도 얻는 바가 많았고,
선명한 색채감이나 유동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일본의 풍속화(우키요에)에서도 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로서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에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부분에도 명도가 낮은 색채, 파랑이나 보라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색조의
분활이라든가 색채의 병치라고 하는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고인하였다. 빛의 광휘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수색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수색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위에서 혼연히 융합되고,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의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함을 간직하기 때문이었다.

신인상파는 인상파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원리를 더욱 철저하화 데서 출발하였다. 신인상주의 쇠리와
시냐크를 대표로 하고 그들의 이론에 공영하여 모인 화가들에 의한 회화운동은 인상파 그룹이 사실상 결속을 해체한
1880년부터 대두하였는데, 주도자인 쇠라의 목적은 인상파가 직관적'주도자인 쇠라의 목적은 인상파가 직관적'
경험적으로 체득한 색채에 의한 광휘표헌법을 극도로 과학화하고 이론화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당시 물리학계에서
크게 연구개발되고 있던 슈발뢰르와 헬름홀츠, 루드 등의 광학과 색채이론을 화면에서 체계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만만찮은 정열을 기울였다. 그들이 흔히 분할파라든다 점묘파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이러한 기법상의 특색 외에도 특히 쇠라의 경우 인상파가 경시한 화면구성이나 형체의 질서를 다시 정밀하게
확보한 것은 후기인상파는 인상파에 속하거나 또한 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차츰 그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내부에 인상주의를 수정하려고 한 사람들의 경향을 가리키는데, 이말은 훗날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에 의해 아주 막연한 의미에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기인상파로는 세잔, 고흐, 고갱 등을 지칭하는데, 동시대인인 로크레크, 드가, 르누아르 등을 후기인상주의에
포함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물체의 실재감과 공간 구성을 추구한 세진이건, 강렬한 색과 붓끝으로 내적 생명을 표출한
고흐이건, 또는 원시성과 신비감을 원색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상징적 색채로 나타내려 한 고갱이건, 이 화가들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집단적으로서의 공통성은 없었으며, 오히려 인상파 이후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다채롭고 중요한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이런 사실만 보아도소수 화가들의 12년에 걸친 악전고투의 신상파운동이
그다지 통일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데 인상파화가들은 재능과 기질면이
서로 다르듯이, 화풍에 있어서도 결코 한결같지 않았다. 모네'피사로'시술레 등이 그 중에서도 인상파의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낸 작가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역시 시기에 따라 화풍이 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상파화가들이 유형적인 아카데미즘에 반항하고 어떤 관례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미묘한 대기의
인상을 묘사하는 데 전념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나타낸 예로서 그들은 앞서 든 화가들 외에도 부댕이나 용킨트 등의 작품에서 찻아볼 수 있는
기법상의 특색에서도 얻는 바가 많았고, 선명한 색채감이나 유동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일본의 풍속화(우키요에)에서도
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로서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에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부분에도 명도가 낮은 색채, 파랑이나 보라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색조의 분활이라든가 색채의 병치라고 하는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고인하였다.
빛의 광휘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수색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수색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위에서 혼연히 융합되고,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의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함을 간직하기 때문이었다.

신인상파는 인상파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원리를 더욱 철저하화 데서 출발하였다. 신인상주의 쇠리와
시냐크를 대표로 하고 그들의 이론에 공영하여 모인 화가들에 의한 회화운동은 인상파 그룹이 사실상 결속을 해체한
1880년부터 대두하였는데, 주도자인 쇠라의 목적은 인상파가 직관적'주도자인 쇠라의 목적은 인상파가 직관적'
경험적으로 체득한 색채에 의한 광휘표헌법을 극도로 과학화하고 이론화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당시 물리학계에서
크게 연구개발되고 있던 슈발뢰르와 헬름홀츠, 루드 등의 광학과 색채이론을 화면에서 체계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만만찮은 정열을 기울였다. 그 결과 색조분활을 함에 있어 세밀하고 무수한 색점을 사용하는 분할묘사법을 고안하여,
광선효과를 최고도로 발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이 흔히 분할파라든다 점묘파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이러한 기법상의 특색 외에도 특히 쇠라의 경우 인상파가 경시한 화면구성이나 형체의 질서를 다시 정밀하게
확보한 것은 이 파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후기인상파는 인상파에 속하거나 또한 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차츰 그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내부에 인상주의를 수정하려고 한 사람들의 경향을 가리키는데, 이말은 훗날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에 의해
아주 막연한 의미에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기인상파로는 세잔, 고흐, 고갱 등을 지칭하는데, 동시대인인
로크레크, 드가, 르누아르 등을 후기인상주의에 포함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물체의 실재감과 공간 구성을 추구한
세진이건, 강렬한 색과 붓끝으로 내적 생명을 표출한 고흐이건, 또는 원시성과 신비감을 원색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상징적 색채로 나타내려 한 고갱이건, 이 화가들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집단적으로서의 공통성은 없었으며,
오히려 인상파 이후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다채롭고 중요한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랑자트섬의 오후, 올랭피아, 풀밭에서의점심식사, 피리부는소년, 햇빛속의누드

야수파 (Fauvism)

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녀녕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바로크'는 예술에 관한 문헌에서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언어로 그 어원은 불확실하다.
바로크 "불규칙적" 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그 단어가 불규칙적한 진주라는 뜻의 포루투갈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인 듯
하다.이말은 부르크하르트와 봘플린에 의해 미술사 및 비평 용어로 사용되면서 전문적인 용어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바로크는 세가지 중요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첫째, 미술사에서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 즉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의 양식을 말한다. 둘때, 특정한 양식에 대한 관념에 의해 특징짓는 일정 기간~보통 17세기를 말한다.
따라서 "바로크시대, 바로크 정치, 바로크 과학" 이라는 말이 있을수 있다. 셋째, '바로크'라는 말은 지금은 과거의
경멸적인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예술에 관한 문헌과 비전문적인 일상어에서 "변덕스러운", "장식이지나친",
"현란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왕권의 번영과 함께 등장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
성당 건축과 함께 궁전 건축이 중심이었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은 대표적인 예이다. 명암은 강한 대비를 이용하여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주제가 등장한 회화는 풍경화, 정물화, 세속적 인물화가 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바로크 예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의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과는 다른 것이지만 메너리즘의 종종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점이나 로코코의 신경질적인 단평성 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균형과 공동되는 점이 더 많다. 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하게 하는 것이 바로크 작품의 특징이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형'완결등에 대해 경탄과 현혹을 지향하여 양감, 광채, 동감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의복의 표현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 있어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였던 카라밧지오는 측면 광선에 의한 명암의 강한 대비를 나타냈고, 주로 종교화를 그렸던 엘그레코는
성모마리아의 승천, 십자가의 크리스트 를 그렸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즈는 왕녀마가렛, 시녀들 을 그렸고,
풍만한 육체와 풍요로운 색채로 웅장한 구성과 생동하는 필력을 구사했던 루벤스도 유명하다. 집중적인 광선의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렘브란트의 야경, 자화상 등은 바로크 미술의 절정이다, 그외에 푸생, 반다이크, 할스,
베르메르등이 있다.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밧지오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풍습으로의 복귀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와 베네치아 -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렛지오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 풍요로움이 비롯된다. 이 세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초로,
또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부인의초상, 칸바일러의초상, 댄스, 빨간조화, 드랑의 초상

입체파 (Cubism)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1908 마티스가 브라크의 에스타프 풍경 이란 연직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진느풍의 입체주의, 분석적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수 있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인 표현을 패기한 대신 시점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활되어 나타난다. 그후 트롱프뢰이유나 파피에 콜레에
수법을 채용하고, 이것을 과도기에 입체파 운동은 후기로 들어간다.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있는 요소와 결합'융합된다. 몽마르트르의 세탁선에
거주했던 피카소, 브라크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 밖에 몽파르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고,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상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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