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우리조상들은 대체로 요서,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사이에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석기 시대 사람들은 실용적인 생활도구를 만들어 썻고,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토기도 만들어 썻다. 그들은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사상에서 자연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정 동물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바탕으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토기는 표면에 색채를 발라서갈거나, 점'선'원과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 무늬를 압각하였다. 기교적으로는 세련된 형태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기시대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 이외에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도 이루어졌다. 신석기
시대의 미술품으로는 우선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 있다. 약간 배가 부른V자 모양의 토기 표면에 평행으로 사선을 그어서 장식을 하였는데, 선의 방향을 줄에 따라서 엇갈리게 하기도 하였다. 가지런한 선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토기의 무늬는 단순히 미적인 것이 아니라 주술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원시 미술에서 평범한 사선은 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토기에 그려진 무늬는 그들의 중요한 식량인 물고기가 사는 물을
상징하며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된 이후 직선적인 무늬는 곡선적인 것으로 발전하고, 선을 꺾어 돌리는 번개무의도 나타나게 되었다. 번개 무늬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천둥을 상징한 것이다. 또 이 시대의 미술품은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로 만든 치레걸이,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등이 있었다. 이들 조각품 모두 식량의 풍요나 악귀의 축출을 비는종교적인 필요에서 만든 것이라고 짐작된다.

빗살무늬토기, 고령양전동, 암각화, 손도끼, 말, 산양

청동기시대

청동기를 사용하고 농사가 발달하면서 평등했던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사유재산이 축적되고 계급이 발생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철기 시대는 사회와 경제가 급격히 발전되었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예술활동도 활발해졌다. 이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 그림등에 반영되어 있다.

이시기의 미술에는 장식에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 많다. 그모양이나 장식에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새나 말의 조각을 붙이거나 혹은 쌍방울을 단 칼자루끝 장식, 말이나 범의 모양을 한 띠고리, 둘이나 다섯 혹은 여덟의 방울을 단 의기등 다양한 미술품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인 돌널무덤등에서 출토된 정동제 의기들은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손 모양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면을 쪼아 새긴 바위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에 찬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시대 미술품으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암각화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물고기 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염원의 표현으로 보인다. 고령의 바위 그림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등의 기하각 무늬가 새겨져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른 농업 사회에서의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를 비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반구대암각화, 동물문병갑, 흑도, 민무늬토끼, 문방패형장식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서 미술이 시작된 것은 선사시대부터지만 좁은 의미에서 미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삼국의 미술은 중국, 인도, 페르시아등 외국의 미술을 수용하고, 삼국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점차 많은 공통점을 지니게 되어 후에민족미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전체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미술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이었다. 토우 같은 것에 아직도 치기어린 괴기성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이를 극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르익은 산물은 아니었다.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실적인 미술이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19대 광계토대왕 시대에 만주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광대한 지리적 풍토와 외세의 영향을 받아 길러진 늠름하고도 분방하며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기상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도 힘과 정열이 넘쳤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미술은 옛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성 부근에 있는 고분, 불교조각, 금속공예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돌무지 무덤과 굴식 돌방 무덤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굴식 돌방 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돌무지 무덤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계단식으로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올렸다. 맨 아래층의 길이는 약 30cm이고, 높이는 약 13m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길이와 높이를 줄여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굴식 돌방 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있기도 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굴삭돌방 무덤은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굴식 돌방이 있는것으로 쌍영총, 무용총, 강서 고분등이 유명하다. 여기에는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 사신도등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남성적인 기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해준다. 말을 달리며 활을 겨누는 기마인물들이나 달아나는 짐승들이 모두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전에 비해 구성이나 묘사법이 훨씬 합리적이며 색채도 훨씬 선명해지게 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주로 영생사상을 반영해 주는 죽은 사람의 생활기록이 가장 많다. 선이 굵고 강직하며 주제를 상징적이고 박력있게 다루어 대담하고 웅혼한 고구려인의 대륙적 기상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회화는 표현 수법이 추상화되고, 다채로우며, 리드미컬한 묘사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적인 미술이 형성되어 담징, 가서일등을 통해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담징은 일본에 건너가 채색, 지묵의 방법을 전해 주었고,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 미술의 특색은 회화 못지않게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을 비롯하여 불상들의 나부끼는 옷자락이나 화염문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은 두꺼운 법의를 입어 몸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신비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공예는 통구와 평양 지방에서 나온 기와와 벽돌에 새겨진 장식 무늬에서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과 솜씨를 알 수 있다.

각저총의, 씨름도, 사신총의 현무도, 무용총의수렵도, 묘추인초상, 강서, 대묘의현무도

백제

백제는 부여족의 일파가 한반도의 서남부로 이동하여 옛 심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백제의 미술은 북방적인 성격을 가진 원래의 전통에 중국과의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하였다. 불교미술과 중국의 남조 문화를 흡수하여 온화하고 우아하며 향토적인 색채의 아름다운 미술을 발전시켰다. 백제의 미술은 매우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되었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 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수있다.

백제의 회화는 능산리고분의 비운문과 연화문에서 볼수 있듯이 부드럽고 완만한 움직임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 부여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매우 세련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의 회화는 6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회화에 영향에 영향을 미친다. 597년 일본에 건너가 아좌태자는 일본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백제 미술의 특징은 불상에서도 드러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양식적인 면에서 외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의 얼굴은 복스럽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차 있어 백제의 미소라 불리운다. 밝은 웃음이 가득한 복스러운 얼굴에서 우리는 백제의 미를 볼 수 있게 된다. 부여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관세음보살상은 그 기법이 고졸하며 백제의 온화함에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이러한 불상은 일본에 전해져서 아스카 시대 조각의 터전을 이룩했는데, 나라의 법릉사 백제관음과 광룡사의 목조반가사유상등 훌륭한 작품을 낳게 하였다.

공주 송산리의 무령와릉은 무령와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물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발전된 공예미술을 보여준다. 최근에 부여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 대향로도 도쿄와 불교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 훌륭한 공예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오늘날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룡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절의 건축 원형을 찻아볼 수 있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시을 모방한 초기 양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미륵사지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서 9층이며, 우리나라 탑 건축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그 구조가 목조 건축의 양식으로 되어 있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탑은 각충의 체감률이 심하여 안정감을 강조하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한 균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어 내강의 힘이 전체에 흐르고 있다.

납석제 불좌상, 금동 대향로, 미륵사지석탑, 서산마애삼존불상, 산수문전

신라

한반도의 남동부를 차지한 신라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지역적 조건 밑에서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이루었다. 신라의 미술은 소박한 가운데 조화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의 미술은 중국의 남조 문화와 고구려, 백제등과 접촉하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5세기 후반에 전래된 불교의 영향으로 더욱 화려한 독특한 종교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고분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 당시의 뛰어난 공예 예술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미술은 전체적으로 보면 이웃했던 고구려나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엄격하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기까지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고분들에서 출토된 천마도, 기마인물도 서조도, 우마도등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 회화의 뛰어남을 보게 된다. 이 그림들은 모두 화원의 작품이기보다는 공장에 의한 공예화였다.

고신라 말기에 회화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채전을 설치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회화 수준은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화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 미술은 삼라 중에서 신라가 가장 늦게 시작하였으나, 이미 6세기 후반에는 특유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거창군에서 출토되어 간송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보살입상은 6세기 경에 신라화된 불상의 좋은 예이다. 몸의 좌우에 삐쭉찌쭉 돋아난 도식화된 옷자락과 x자형으로 교차된 주대와 다리 위로 늘어진 천의 자락은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보살의 특징적인 얼굴과 경적된 몸매등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 이러한 경향은 방형태좌동제 미륵반가사유상 등 일련의 불상 들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불상은 삼화령미륵삼존석불이나 황룡사지 출토의 금동보살두에서 처럼 밝은 표정을 보이지만 몸의 비례나 옷의 처리등에는 여전히 추상성이 감돌고 있다. 신라 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을 비롯한 금속공예품과 토기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신라의 금관을 위시한 금속공예는 대개가 매우 정교하고 호화로우며 또 간혹 현대적인 감각을 풍겨주기도 한다. 특히 금관의 입식운 당시의 수목 숭배사상과 사슴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져 당시 신라인들의 토속신앙이나 사상도 엿보게 한다.

금속 공예나 공예와는 대조적으로 토기는 다소 조방하고 거칠며 문양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이다. 그러나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 수 있듯이 조형성이 뛰어난 특성도 보여준다. 이밖에도 삼국시대에는 가야도 높은 수준의 미술을 발전시켰음이 금속공예나 이형토기등을 통해 확인된다. 고령 지산동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기마인물형토기 등을 예로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금관, 토우장식항아리, 굽다리접시, 천마도, 금동반가사유상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삼국 시대에 비해 보다 화려하고 원숙하며 또 국제성이 강하였다. 삼국시대 미술의 소박한 티를 벗고 높은 미적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대 미술은 비록 사실적인 기법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실물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작품속에서 통일된 조화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무르익은 기교로써 이상적인 조화릐 미를 창조하려는 것이 곧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징이었다.

이 시대에는 솔거, 홍계, 정화, 김충의 등의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아 회화가 크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솔거가 그린황룡사의 노송도에 얽힌 전설, 당나라에서 활약한 김충의에 관한 기록, 당의 대표적 인물 화가였던 주방의 그림들을 이시대 신라인들이 대량 수입하였던 일 등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의 회화에서는 청록산수 계통의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산수화와 아름답고 요염한 미인들을 즐겨 다루는 궁정 취향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존하는 통일신라의 유일한 회화인 화엄경변상도는 이시대의 세련되고 균형잡힌 불교회화의 성격과 수준을 잘 말해준다. 또한 전반적으로 동 시대의 불상 양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도 확인할수 있다. 그러나 통일 신라시대 미술의 경향을 보다 두드러지게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역시 불상을 위시한 불교 미술품과 공예품들이다.

이 시대의 불상은 석재나 금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을 구사하여 삼국시대 불상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드디어는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죽하였다. 7세기 후반부터 이미 뚜렷해지기 시작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이 절정에 도달하게 된 시기는 석굴암이 축조된 8세기 중엽경 이라고 볼 수 있다. 이시기는 호국 사상과 일치된 불교미술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삼국시대 고유의 전통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흡수'소화하여 독창적이고 화려한 미술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시에 건립된 불국사의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미술이다.

석굴암 본존불의 둥굴고 이상적인 얼굴. 당당하면서도 뒤티나는 몸매, 몸을 감까고 있으면서도 몸매를 드러내 보드러운 옷자락 이런 모든 것들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조각이 8세기 중엽경에 절정에 달했음을 단전으로 말해준다. 가장 다루기 어렵고 실패하기 쉬운 돌을 매체로 하는 석조의 기법이 여기에서 극도로 정묘해졌을 뿐만아니라 조각된 대상에 정기를 불어넣는 단계로까지 심화되었던 것이다. 본존불의 이러한 특징은 비단옷을 입은 듯한 보살상들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 균형잡힌 몸매, 수려한 용모, 부드러운 의습의 묘사등이 한결같이 뛰어나다. 불국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넓게 트인 앞을 내려다 보고 세워졌는데, 목조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나, 석조물과 기단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신라 불교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앞쪽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등의 돌층계와 범영루는 서로 조호를 이루어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석굴암 불상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통일신라 미술의 특색은 그밖에 이 시대의 많은 석불과 금동불,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비롯한 석탑과 부도, 봉덕사의 전 탑등의 각종 미술품들에 한결같이 나타난다. 즉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시대 미술의 전통을 이어받아 종합하고 외래미수의 영향을 수용하여 세련되고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한국의 미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불교미술로서 독특한 것으로 범종이 있다. 신라의 범종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랜 것은 상원사 종이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성덕대와신종이다. 이 종은 구경이 7척5촌, 높이가 11척인 현존하는 최대의 종일 뿐만 아니라 그모양이나 비천상, 연화문 등의 장식이 아름답다. 한편 서예에서는 김인문, 김생등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김생이 유명한데 고려시대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 비문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시대의 말기에 이르면 불교 의식을 중히 여기지 않는 선종이 유행하고 정치적 혼란이 겹쳐 불상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조형 미술이 경직되고 쇠퇴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11면관음보살상, 석굴암본존, 바로자나불상, 금동삼존불상, 나한상

고려시대

신라의 미술을 계승한 고려의 미술은 불교미술의 발달과 송나라 미술의 영향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귀족적인 미술문화를 남겼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불교가 융성하였고 이에 따라 각 방면의 불교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거란'여진'몽고등 북방 민족들의 잇단 침략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고려가 북송, 남송, 원, 명등 중국의 왕조들과 문화적 교류를 번번히 하면서미술 양식을 수용하여 자체의 미술을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시대의 모든 미술이 시종 완벽을 지향했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이시대 미술의 주된 경향은 역시 귀족적 문화를 구현하는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도자기, 칠기, 금속등의 공예가 발달하였고, 특히 상감청자의 독특한 기법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며, 회화 역시 다향한 기법과 양식의 불화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와 비교하여 같은 미술 계통에서도 분야에 따라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 미술에서도 불교회화 와 공예는 호화롭고 정교하여 아취가 넘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지만, 불상이나 불탑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다소 균형이 깨지고 경직된 경향을 띠게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고려시대의 불상이나 불탑등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또한 중앙과 지방과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관촉사석조보살, 삼강청자, 한송사석조보살, 내소사종 주악천녀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우리 역사상 회화가 다양한 양상을 띠며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이다. 이전 고려시대와는 달리 억불 숭유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많은 활약을 했던 승려들의 활동은 약화되었지만, 학문을 중시하고 소박하고 진실됨을 추구하던 유교 정신은 새로운 미의식을 창출해내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청록산수화와는 달리 담백한 수묵(水墨) 위주의 산수화가 주를 이루고, 화조화나 영모화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배어나오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선비들의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천기(賤技)로 생각하여 경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조선시대의 그림을 기교에 빠지지 않고 더욱 담백하고 기품 있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조직화된 도화서를 중심으로 기량이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되어 한국화의 폭을 넓혔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부터 유입되기 시작하던 중국의 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회화 전통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조선 전기(1392-1550)는 조선왕조가 개국하여 국가적으로 나라의 기강을 확고히 하고, 회화에 있어서도 조선시대 특유의 한국적 화풍이 자리를 잡는 시기인 중종 연간까지를 잡는 다. 이때는 새로 정비된 제도하에서 도화서를 중심으로 한 화원 화가들과 선비 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시대에는 이미 고려시대에 들어온 중국 그림과, 새롭게 연경을 중심으로 유입된 명대의 화풍이 토대가 되어 한국적 화풍을 형성해갔다.

-조선 중기(1550-1700)는 회화에 있어서는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던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안견의 화풍을 이은 안견파 화풍의 계승을 들 수 있다. 이들 안견파 화가들로는 이정근, 이흥효, 이징 등이며 이들은 새롭게 대두된 화풍보다는 전통적인 화풍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계승했던 부류이다.

-조선시대 후기(약 1700-1850)는 우리 회화사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정선에 의해 이룩된 진경산수화의 완성과 김홍도에 의한 풍속화의 발전 등 민족 의식의 발현에 의한 새로운 화풍의 형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화풍의 발현은 조선 후기의 사상적 발전을 배경으로 하는데,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연간에 부흥한 실학 사상(實學思想)의 발전은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때에는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몽유도원도, 설중귀려도, 씨름

근대

한국의 근대미술은 개화기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18세기 이후 일련의 근대적 자각현상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대원군의 하야와 더불어 문호가 개방되고 외국기술에 의해 많은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서양식 조형방법의 직접적인 전래가 이루어지고 서양식 교육기관과 새로운 학문의 도래와 함께 서양화 기법의 도래 또한 일반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서양화 도입은 1910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한 고희동으로부터 시작되는 데 그는 중앙학교에서 도화선생이 도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화선생이 된다. 고희동에 이어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이 서양화를 수업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양화단은 도입기의 작가들의 뒤를 이은 제 2세대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희동등을 통해 양화의 기초를 익힌 후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작가로 장발과 이종우, 임용연 등이 있다. 이종우는 한국인 최초로 국제적 미술전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다. 1930년대 동양화단은 전통적 관념산수가 최조하고 사경산수와 일본화의 신감각주의가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물과 화조를 중심 모티프로 하는 색채화의 신감각주의 계열로 김은호, 정찬영, 최우석, 한유동 등이 있다. 당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였던 김은호는 여러 방면의 소재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로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다.

빨래터, 흰소, 나는 새 두마리

현대

한국의 현대미술은 8 ·15광복을 그 기점으로 삼는다. 일제의 억압과 질곡으로 단절되었던 전통미술의 창조적 계승과 세계미술에의 참여가 이 시점에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8 ·15광복 직후에 발족한 조선미술협회는 한국 현대미술의 모체를 이루었으며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산업미술가협회 ·조선조각가협회 ·미술문화협회 ·신사실파(新寫實派) ·50년미술협회 등이 잇달아 결성되었다. 또한,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9월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정부가 미술정책에 관여한 최초의 경우로서 당초 국내 미술인들의 창작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더욱 활발해진 한국 작가들의 해외교류 활동과 그 수상 횟수의 증가 등은 한국의 미술이 종래의 지방적인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국제적으로 개안(開眼)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 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던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의 갈등도 와해되면서 화단 구조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92년에는 한동안 활발히 논의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과 이념지향적 미술운동도 퇴조하는 경향이 엿보였다. 이는 그 동안 잠복해 있던 가치들이 새롭게 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다익선